[詩와 茶 그리고 香氣] 슬픔을 말리다 / 박승민(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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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茶 그리고 香氣] 슬픔을 말리다 / 박승민(1964~)
  • 김명기
  • 승인 2020.09.2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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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말리다 / 박승민(1964~)

이 체제下에서는 모두가 난민이다. 진도 수심에 거꾸로 박힌 무덤들을 보면 영해조차 거대한 유골안치소 같다. 숲 속에다가 슬픔을 말릴 1인용 건초창고라도 지어야 한다. 갈참나무나 노간주 사이에 통성기도라도 할 나무예배당을 찾아봐야겠다. 神마저도 무한 기도는 허락하지만 인간에게 두 발만을 주셨다. 한 발씩만 걸어오라고, 그렇게 천천히 걸어오는 동안 싸움을 말리듯 자신을 말리라고 눈물을 말리라고 두 걸음 이상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말리다”와 “말리다” 사이에서 혼자 울어도 외롭지 않을 방을 한 평쯤 넓혀야 한다. 神은 질문만 허락하시고 끝내 답은 주지 않으신다. 대신에 풍경 하나만을 길 위에 펼쳐놓을 뿐이다.

마을영감님이 한 짐 가득 생을 지고 팔에서 막 빠져나온 뼈 같은 지팡이를 짚고 비탈을 내려가신다. 지팡이가 배의 이물처럼 하늘 위로 솟았다가 다시 땅으로 꺼지기를 반복하는 저 단선의 봉분. 짐만 몇 번씩 길 밖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길 안으로 돌아와서는 간신히 몸이 된다. 짐이 몸으로 발효하는 사이가 칠순이다. “말리다”에서 “말리다”驛까지 가는데 수없이 내다 버린 필생의 가필이 있었던 것이다.

 

[쉼표] 박승민 시인이 세 번째 시집을 냈다.

『끝은 끝으로 이어』(창비2020년 9월 간) 세 번째 시집을 읽고도 굳이 두 번째 시집의 표제시를 올린다.

그는 영주에 산다. 대학 시절을 빼고는 줄곧 영주에 머무르며 시를 쓴다.

그의 시는 시적 기교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시를 통해 보여주는 세상은 때로 지리멸렬하고 나약하다.

그런 세상을 기교 없이 보여주는 것은 시에서 위험한 일일수도 있다.

자칫 그것은 시를 벗어난 푸념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박승민은 끊임없이 낮고 낡은 것에 대해 연민을 떨치지 못하는 시인이다.

시도 기류나 유행을 쫓는다.

그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 곳에서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시에 정진한다는 것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여전히 세상의 절반은 어둡고 힘들다.

시인은 그 절반의 슬픔을 어떻게든 꺼내어 말리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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