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茶 그리고 향기] 코끼리가 사는 마을 / ​김균탁(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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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茶 그리고 향기] 코끼리가 사는 마을 / ​김균탁(1982~)
  • 김명기 시인
  • 승인 2024.04.09 1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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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가 사는 마을 / ​김균탁(1982~)

​ 마을을 질주하는 커다란 코끼리를 본 적이 있나요? 신문 하단에 사진 한 장 없이 실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나요? 코끼리가 나타난 건 나른한 봄날 오후였죠, 아이들은 함성을 지르며 어두운 골목과 붉은 낙서 위를 뛰어다녔고 지친 노인들은 우아한 하품을 하며 장기판에 놓인 포처럼 생을 건너뛰었죠, 불 꺼진 집에서 엄마는 목을 메고

누나는 시커멓게 잠이 들었죠, 할머니가 주워 온 폐지를 삶아 먹은 아이들은 감기에 걸리기 시작했고 기침을 하며 떠난 아이들은 장례식에도 돌아오지 않았죠, 코끼리가 휘두른 코에 머리가 깨진 아이들은 곰팡내 가득한 장판에서도 거룩한 기지개를 폈고 죽어도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낙서와 돈 벌어 오겠다던 약속을 기억하며 울었죠, 백날이 천 날이 되듯 영원이 되는 기적을 이룬 마을에는 잠이 드는 사람이 없었죠, 코끼리가 휘두른 긴 코에 생도 담처럼 부서질까 잠이 들 수 없었죠, 마을을 질주하는 커다란 코끼리를 본 적이 있나요? 둥근 달이 낮게 뜬 마을에 코끼리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나요?

[쉼표] 안동 사는 김균탁 시인의 첫 시집을 읽었다. 나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파쇄된 문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시가 미천한 경험을 덮어주는 감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또 다른 일군의 젊은 시인들은 짧은 경험도 소중히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더 큰 파장을 울리기 위해 감각보다 의지에 몸을 묶고 밀고 가는 시적 형태를 보이는데 이것은 고무적이다.

오늘 읽은 김균탁의 시 여러 편에도 몸으로 밀어 붙인 시가 몇 편 보인다. 첫 시집다운 패기와 감각적인 문장도 눈에 들어온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파쇄적 문장이나 미천한 경험 같은 말은 취향의 문제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형편없는 것은 다른 문제다.

봄에 나온 첫 시집을 읽으며, 이 봄 녹슨 꽃보다 더 짙은 꽃이 되시길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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