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茶 그리고 香氣] 청혼 / 진은영(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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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茶 그리고 香氣] 청혼 / 진은영(1970~)
  • 김명기 시인
  • 승인 2022.11.28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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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 / 진은영(1970~)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쉼표] 시는 내재적 서정이 문장으로 치환 될 때 비로소 작품이 된다. 생각해보면 감정 안에 숨겨 놓은 말이 얼마나 많은가. 그 중 뽑아 쓸 수 있는 말은 얼마나 될까. 그렇게 뽑아 쓰는 말이 정수라면, 진은영의 시 「청혼」은 시의 정수에 가깝다. 근래 읽은 시중, 아름답다고 느낀 유일한 시다. 시가 굳이 아름다워서 무엇에 쓸까 싶지만,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쓴다면 시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시는 아름답지 않은 세계, 빠져나오기 곤혹스러운 심연에서 뽑아낸 언어로 반짝인다. “오래된 거리처럼” 익숙하고 낡은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있”는 상황까지 확장되는 모든 순간을 우리는 다 사랑 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마침내 고백에 다다를 수 있을까.

진은영 시인은 매 순간 끊임없이 의심하고 비난하고 증오하며 갈라지는 세상을 향해 청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청혼은 아름다운 일이다. 아름다운 일을 위해 아름답지 못한 시간도 기꺼이 끌어안고 감내하는 일은 또 얼마나 깊은 슬픔인가. “투명 유리조각처럼” 날카롭고 훤히 들여다 보이는 슬픔마저 죄다 마신 다음 여전히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가려 낸 언어들.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는 이 시는 아름다워 하냥 슬플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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