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茶 그리고 香氣] 거미 / 이향지(1942~)
상태바
[詩와 茶 그리고 香氣] 거미 / 이향지(1942~)
  • 김명기 시인
  • 승인 2022.11.13 16: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거미 / 이향지(1942~)

거미를 좋아하지 않는다. 거미를 좋아할 이유는 열 가지도 넘지만, 싫어할 이유도 그만큼은 된다. 거미 눈과 내 눈이 딱 소리 나게 마주친 적이 있다. 땅거미였는데, 두 눈이 딱 소리 나게 마주친 거다. 거미도 나도 얼어붙었다. 초점과 초점 사이에서 불이 일었다. 푸른 불꽃이었다. 내가 먼저 초점을 옮겨서 불꽃을 거두었다. 그제야 땅거미가 움직였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한 마리의 땅거미가 움직이자 그에 딸린 대군이 움직였다. 걸음아 나 살려라가 아니었다. 서열별로 한 줄 종대를 이룬 그대로 보폭을 맞추며 줄줄이 따라갔다. 그 이사가 그렇게 아름다웠다. 거미 눈이 밝고 맑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쉼표] 올해 읽은 시집 중 제일 충격이었던 시집이 이향지 시인의 『야생』이었다. 이향지 시인은 42년생이시니 여든이 넘는 세월을 사셨다. 생물학적으로 여든이면 그곳이 어디든 원로라고 지칭되는 나이다. 이미 젊은 시절 문명을 떨치고 원로가 된 시인들의 시에서 긴장감이 떨어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로 후일담인 시가 새로울 것도 특별히 긴장감을 줄 수도 없다. 다만 원로들의 문학적 행보가 그들의 시를 추앙할 뿐이다.

그런데 이향지 시인의 경우 프로필을 가리고 읽으면 도무지 여든이라는 세월을 종잡을 수 없다. 문장의 밀도나 행간의 긴장이 젊은 시인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다. 팽팽한 서사의 구조를 가졌으며, 어떤 시 한 편도 삿된 시가 없다.

시집을 읽는 내내 나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가늠도 장담도 할 수 없다. 여전히 진행중인 진화의 시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게으른 자는 절대 쓸 수 없는 농축된 문장들을 읽으며 충격적이었고 행복했다. 짧은 시편이 없어서 산문시인 ‘거미’를 소개하지만 혹시 이향지 시인의 시가 궁금한 독자가 있다면 전편을 읽을 것을 권한다.

사람은 늙어도 문장은 늙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시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더 오래 멀리 진화하는 시를 쓰시기를 기원드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