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다 / 이정록(1964~)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
그럴 때가 있다.
한숨 주머니를 터트리려고
가슴을 치다가, 가만 돌주먹을 내려놓는다.
어딘가에 사나흘 만에 젖을 빨다가
막 잠이 든 아기가 깨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쉼표] 살면서 ‘그럴 때가’ 한 두 번이겠습니까. 무수한 그럴 때를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어찌 보면 모든 현상이 서로 다 맞물려있는데, 너무 쉽게 그냥 지나치는 것이겠지요.
이정록 시인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다 이유가 있었나 봅니다. 놓치지 않은 현상에 대한 자각과 사유가 이토록 애잔한 시를 쓴 것 같습니다.
아버지 무덤가에 아카시아가 자꾸 뿌리를 내려 주변을 파내고 근사미를 뿌렸습니다. 그런데도 또 싹이 자라납니다. 질기고 지독합니다. 그 질기고 지독한 것들이, 큰 불에도 살아남아 먼 산 가득 꽃을 피웠습니다.
바닷가에서 올려다보니 마치 녹슨 것같이 그을린 산을 아카시아 꽃이 가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가 있지요. 이 악물고 파내도 어느 곳엔 그것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요.
이정록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의 표제시를 읽으며 지나간 때와 아직 오지 않은 때를 생각합니다.
2022년 초여름이고 서명된 그의 시집에서 또 한 때가 지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