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茶 그리고 香氣] 여승 / 백석(1912~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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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茶 그리고 香氣] 여승 / 백석(1912~1996)
  • 김명기 시인
  • 승인 2021.10.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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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 / 백석(1912~1996)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 밤 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쉼표]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이다. 그는 평안북도 정주 사람이다.

백석이 월북 시인으로 알려진 것은 사실과 다르다. 백석은 해방 전 만주를 떠돌다 고향으로 돌아간 뒤 분단이 되었다. 백석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을 뿐, 이념 때문에 월북한 시인이 아니다.

그의 시 또한 이념과는 거리가 먼 시들이다.

김수영과 백석을 번갈아 몇 주 연재하기로 한 것은 두 사람의 시는 전혀 다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1930~40년대의 전통 서정시가 어휘의 단조로움을 이미지에 의존했다면 백석과 김수영은 어휘자체로 단조로움을 넘어선 시인들이다.

그중에서도 백석은 그 시절 서정시가 표현 할 수 없는 북방의 언어로 시를 다채롭게 했다. 그의 풍부한 북방의 언어는 우리시단의 축복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7년 이후 그는 시단에서 사라졌다. 분단의 현실 속에서 그의 생사조차 알 길이 없었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작품을 쓰거나 발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96년에 사망했다는 것은 북쪽에서 확인해준 사실이다.

1980~90년대 해금(解禁)과 더불어 남쪽에서는 백석의 시에 열광했지만 정작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북쪽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수영과 백석을 번갈아 읽으며 두 사람의 시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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