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송이의 소근소근 우리들 속 이야기8] / 이것이 인생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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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송이의 소근소근 우리들 속 이야기8] / 이것이 인생이던가!
  • 고경자 다움젠더연구소 소장
  • 승인 2020.07.13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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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지금 누구를 위해 살고 있나요.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루의 2/3를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삶은 노예이다.” 라고요.

저는 지금 노예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정 나를 위한 삶이 아닌 내 주위사람과 내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가는 듯합니다. 나를 위한 2/3의 삶은 아니라도 좋습니다.

적어도 1/10의 삶이라도 나를 위해 살고 싶습니다. 이번 생은 어렵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싶은지나 알고 살고 싶어지네요.

여러분은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내가 아는 네가 아니야~! ‘청소년’ 편

여덟 번째 이야기 <이것이 인생이던가!>

혹시 여러분도 기억하십니까?

제가 어릴적 성장한 시골집 툇마루 밑이나 헛간에 가면 ‘못과 망치’가 늘부러져 있었습니다. 또 어디서 떼어내어 다시 보관해둔 휘어지고 녹이 슬어있는 못 그리고 머리 싸이즈가 각각 다른 망치들... 그중에 못을 뺄 수 있는 ‘장도리’ 도 있었습니다.

또 녹슨 못이 가득 담겨 있던 녹이 슨 찌그러진 ‘분유통’ 말입니다. 그렇게 아버지 손에 늘 쥐어져 있던 못과 망치를...

예전에는 시골에 못과 망치가 흔하게 있었지요. 요즘은 망치를 대신한 드릴과 못을 대신한 피스라는 새로운 장비들이 생겨 못과 망치를 특별히 구입하지 않는 한 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못이 피스(나사못)로, 망치를 전기드릴이 대체하는 것처럼...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는 어른을 보며 성장하는 것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할 이야기가 이 ‘못과 망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못과 망치’로 자신을 표현한 아이가 있습니다. 자신은 남들에게 언제나 상처를 준다고 말합니다. 가끔은 자신이 굳이 한 일이 아니라도 망치의 뒷부분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에 박힌 못을 빼내주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친구는 인간이기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때론 상처받은 누군가를 치유도 해주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말을 합니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아이들은 대부분 “내가 변할 것이다. 변하고 싶다. 미안하다” 등으로 반성의 말을 하는데, 이 친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을 합니다.

그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이 친구는 “고산(高山)의 꽃이 매서운 바람을 이겨내고 버티며 성장하듯이 사람은 상처와 통증을 통해 성장하기에 굳이 바뀌지 않아도 된다” 고 말했습니다. 분명 누군가에게 자신이 상처를 준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친구 나름의 삶의 철학이 있는 듯합니다.

인간은 “아파봐야 성장한다”고 말한 누군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지금부터 이 친구의 그림을 다시 살펴봅시다. 망치의 앞머리 부분은 그다지 둔탁해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못의 크기는 망치크기에 비해 크고 두텁게 그려져 있습니다. 또 못자국의 크기도 크게 보입니다. 못에 박힌 마음의 상처는 아주 클 듯합니다.

누군가에 의해 친구의 가슴에 박힌 상처를 뽑아준 것이지만 그 친구의 상처가 크게 있다는 것도 이 친구는 알고 있나봅니다. 마지막으로 검은색이 아주 두텁게 색칠해져 있습니다.

각각의 사물이 어둡고 크고 또 무겁게 느껴지는 그림은 오히려 깔끔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 친구는 단단하게 자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현재의 상황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보고 관찰하는 아이인 듯 보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 즉 세상에 대한 감수성(感受性)이 높은 사람으로 말입니다.

지금처럼 자신을 잘 알아 가면 진짜 멋진 아이로 성장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등을 보고 성장합니다.

든든하고 푸근한 등을 가진 멋진 어른이 옆에 있길 바래봅니다.

문득 엄마의 품이 생각납니다. 오일장을 보고 두 손 무겁게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오는 엄마에게 반갑게 달려가 엄마의 허리춤만한 키로 엄마를 안았던 기억... 따뜻한 체온...

이 모든 따뜻하고 푸근했던 기억 말입니다. 지금은 자식인 내가 너무 커서 엄마가 제 허리춤까지 밖에 오지 않아 그때를 재연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장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가 그리워하던 엄마의 따뜻하고 푸근한 품이 생각납니다.

이 한주는 엄마랑 같이 고기 먹으러 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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