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 전 울진교육장, 외가(外家) 조상인 전선(田銑)의 『만은집』 국역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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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 전 울진교육장, 외가(外家) 조상인 전선(田銑)의 『만은집』 국역 발간
  • 전석우
  • 승인 2024.03.2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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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전(田)씨 외손인 임경 전 울진교육장이 울진 산불로 소실된 외갓집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외가 조상의 묻혀 있던 역사를 새롭게 밝히고자 『국역 만은집』을 사비로 지난달 발간했다.

만은(晩隱) 전선(1599~1693)은 울진 북면 출신으로 현존 최고(最古)의 군지인 『울진군지』 (1939년)’ 덕행조에 기록된 유학자다. 95세의 나이로 장수한 그는 저술로 『만은집』을 남겼다.

고전문학을 전공한 김명균 박사가 한문으로 된 『만은집』을 모두 한글로 번역했으며, 일반인들도 400여 년 전 울진의 큰 선비로 살았던 만은의 학문과 사상을 접할 수 있게 됐다.

주요 책 구성을 보면 해제/ ‘기호사림의 큰선비 만은 전선(김명균)’을 시작으로 만은집 전(全), 만은집 권지1, 만은집 권지2, 만은집 권지3, 발문, 국역 만은집 발문(임경 전 울진교육장), 만은집 영인 등 순으로 302쪽 분량이다. 또 상세한 주석까지 붙여서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엮어 놓았다.

『국역 만은집』이 다시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임경 전 울진교육장 덕분이다. 전선의 문집은 사후 220년 후인 1916년에 후손에 의해 순 한문으로 처음 간행됐었다. 옛 기록의 번역은 지역학 관심도 제고와 고문서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임 교육장에 따르면, 지난 2022년 3월 울진 산불로 외갓집 전씨 종가에서 보관 중이던 모든 서적, 문서와 「만은선생문집」, 「만은집」도 모두 소실되었다 한다. 「만은선생문집」과 「만은집晩隱集」은 전선의 시문과 그의 사후 관련 원고를 모아 엮은 유고문집이다.

이에 임경 교육장은 전씨 외손이지만 화재로 소실된 서적과 고문서, 호희당(嘷熙堂) 편액 등 관련 내용을 세상에서 찾았다. "기억하지 못하거나 정리되지 못한 것들이 소실(燒失)되어 돌아오지 못하며 만날 것을 기약하지 못한 채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을 가슴 아파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만은선생문집」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디지털화하여 둔 자료로 확인할 수 있었다. 또 국학진흥원에 「만은집」으로 두 질이 보관되어 있었다.

임경 전 교육장의 외삼촌 전호원(田鎬元) 선생이 국역 만은집 발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만은집 제1권에는 만은(晩隱) 전선의 시문과 그가 지은 상소문, 잡저, 만사, 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후인들이 누차 애석해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글이 불타 없어지고, 겨우 13편의 시문과 ‘나의 묘지명[自誌]’과 4편의 만사(輓詞), 잡저 4편, 아들의 제문 1편만이 수습되어 수록되었다.

제2권은 부록으로 전선의 족후손 홍점弘點이 쓴 ‘행략(行略)’과 만은의 10대손 병국炳國이 쓴 ‘가장(家狀)’, 묘갈문, 묘지명, 옥계별묘 봉안문, 구장사 봉안고유문 같이 대부분 만은(晩隱)의 학덕을 기려 봉향하기 위한 행사용 글이 실렸다.

제3권에는 전선을 제향(祭享)하기 위한 도움을 요청하거나 의견을 묻는 간찰 등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글들은 만은(晩隱)의 삶을 직접 보여주는 글이라기보다는 그를 기리고 받드는 가문과 지역 유림의 노력과 정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또 각 서원에서 숭앙하는 인물들을 존양(尊攘)하기 위한 절차나 경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늦은 봄 역정(驛亭)에서 나그네 발길 멈추니, 무리 찾는 산새 소리에 깜짝 놀라네. 앞에 펼쳐진 벽해의 깊이 천 자라 한들, 전생이 나를 보내는 정에는 미치지 못하리.[원문 春晩郵亭滯客行。驚聞谷鳥喚群聲。前臨碧海深千尺。不及田生送我情。](한국고전번역원)
“늦은 봄 역정(驛亭)에서 나그네 발길 멈추니, 무리 찾는 산새 소리에 깜짝 놀라네. 앞에 펼쳐진 벽해의 깊이 천 자라 한들, 전생이 나를 보내는 정에는 미치지 못하리.[원문 春晩郵亭滯客行。驚聞谷鳥喚群聲。前臨碧海深千尺。不及田生送我情。](한국고전번역원)

임경 전 울진교육장은 “우암 송시열이 함경도에서 남쪽으로 유배 가다가 울진을 지나면서 비 때문에 역참에 지체되었을 때 만은 전선과 여러 날 학문과 사상적 교유를 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 꼽히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과 만남 등을 통해 봤을 때 전선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잘 알게 해 준다”며, “이번 만은집 국역을 통해 기호사림의 큰 선비로 살았던 전선의 학문과 사상은 물론, 당시 울진지역의 유학세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1939년 발간된 『울진군지』 덕행(德行) 조에는 전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선(田銑) 호는 만은(晩隱)이니 묵암(默菴) 필위(弼違)의 손자이고 가선(嘉善)이다. 약관에 앞장서서 이이첨(李爾瞻)의 죄를 처벌하라 청하였고 여러 번 과거시험을 치렀으나 오르지 못하였다. 시골에 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그 가르치는 곳을 호희(皥熙) 또는 취간(就閒)이라 하였다. 우암 송시열이 남쪽으로 유배감에 특별히 아껴 시를 준 것이 있다. 철종 무오년(1858)에 옥계(玉溪)의 선비들이 별묘(別廟)를 세워 우암 송시열을 모셨는데 그 옆에 전선을 봉향(奉享) 하였다. 또 동당(同堂)인 우와(愚窩) 전구원(田九畹)과 구장사(龜藏祠)에 함께 배향하고 화동(花洞)에 유허각(遺墟閣)을 세웠다. 유집을 간행하였다.(『국역 울진군지』(2012년) 192~19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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