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茶 그리고 향기] 밀봉된 것들은 뜯지 않을 때까지 진심이다 / 권현형(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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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茶 그리고 향기] 밀봉된 것들은 뜯지 않을 때까지 진심이다 / 권현형(1966~)
  • 김명기 시인
  • 승인 2024.01.02 1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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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봉된 것들은 뜯지 않을 때까지 진심이다 / 권현형(1966~)
 

복도에 뜯지 않은 상자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박제된 무엇이 상자 속에 들어있나

물기 없는 꽃? 나비? 접시?

상자마다 진심이 들어 있을 것이다
 

빛을 어디서 살 수 있나 찾아 헤맸는데

지하철에서 빛이 담긴 상자를 천 원에 팔고 있다
 

손전등만한 빛을 어디다 쓰려고 사나

쓸모없어, 다신 사지 않을 거야, 금방 후회하는 얼굴로

빛을 헐값에 산 자들이 전철 안에 담겨 있다
 

손전등을 들고도 캄캄한 얼굴로 앉아 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우비를 사고

초강력 본드를 사고 티눈 연고를 사고 절명 직전까지

원 플러스 원으로 빛을 조금씩 사 모으는 것일까
 

언젠가 고속버스 안에서 금딱지 시계를 살 수 있는 행운에

당첨되었는데도 번호표를 쥐고만 있었다

움직이는 전철 안에서 파는 빛 한 상자를 사지 못했다
 

밀봉된 빛을 마침내 뜯으면

유통기한이 없는 어둠이 왈칵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쉼표] 시골에도 수시로 택배차가 드나듭니다. 도시의 아파트나 빌딩에서는 수많은 택배를 보내고 받겠지요,
시인은 개봉되지 않은 상자마다 진심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중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과잉과 과장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포장되고 있을 과잉의 상자들을 생각해 봅니다.
밀봉된 채 뜯기지 않을 때까지의 진심. 상자를 여는 순간 진심보다 더 어두운 과잉이 쏟아질 테니까요. 아무리 부정해도 더없이 풍요로운 세상입니다. 그것을 비난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우리의 진심을 고작 상자 속에 가두었어야 되겠습니까.
오늘 읽은 권현형 시인의 시는 풍요로움을 좀 더 풍요롭게 사는 방법을 고민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진심을 뜯고 나면 쏟아질 어둠을 한 번쯤 의심해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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