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茶 그리고 향기] 오늘의 처방전 / 강 순(1969~)
상태바
[詩와 茶 그리고 향기] 오늘의 처방전 / 강 순(1969~)
  • 김명기 시인
  • 승인 2023.11.20 15: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처방전 / 강 순(1969~)

어제는 몇 개의 목적어를 잃고 귀가했습니다 당신이 내 목적어 중 하나를 습득했다면 발견하는 대로 속히 연락 바랍니다

나는 어제 태풍 속 벽오동처럼 많이 흔들렸습니다 의사는 어려운 말들을 대롱대롱 가지에 늘어놓았습니다 가지가 바닥을 향해 출렁이자 줄기가 허공으로 크게 흔들렸습니다

오늘 내가 쓴 문장은 주어가 여러 개여서 당신도 내 문장들 속 주어가 되었습니다 햇살이 좋은 세 시쯤 당신이 내가 잃어버린 목적어들과 교합할 때 꽃잎이 잠시 반짝였습니다

나의 서술어들은 집으로 돌아와 쉬고 있습니다만 내일은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 의사는 운동 요법도 함께 처방 내리며 경과를 보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끝을 흐렸습니다 정직한 서술어는 종종 어간과 어미를 혼동하며 말끝이 밟히는 습관을 지녔습니다

한숨을 매단 느낌표가 나타나서 의사가 진단 내린 문장을 자주 반복적으로 따라다녔습니다 나는 가구 위로 날아다니는 예민한 느낌표를 잡아다가 어제저녁 과감하게 서랍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그 후 서랍 속에는 하루 세 번의 처방약을 먹고 말줄임표가 마구 자라납니다 침묵이 보약이 될지 몰라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을 예정입니다 많은 말들을 서랍에 구겨 넣었더니 오늘 밤 책상 위에는 나라는 단독 주어만 남았습니다

당신의 물음표가 한밤중에 침대에서 발견되어 허겁지겁 일기장에 잘 보관해 두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같은 일이 반복될 것 같아 만년필을 침대맡에 두었습니다 당신의 물음표는 색깔과 크기가 매번 달라집니다

그래도 오늘은 의사를 만나고 왔으니 안심입니다 내 증상에 대해 의사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왼쪽으로 이십삼 점 오 도 정도 기울이며 잃어버린 목적어를 빨리 찾아보라고 조언했습니다 의사는 지구의 자전축 각도만큼 해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일은 바람과 꽃잎이 함께 쉴 수 있는 의자를 마당에 내놓을 생각입니다 당신의 물음표를 거기다 올려놓을 테니 나 몰래 언제든 다녀가시기 바랍니다

[쉼표] 강순 시인의 시에서는 서정을 따라가는 내재율이 돋보인다. 산문시를 쓸 때 종종 내재율이 박자를 놓쳐 엇박자가 되거나 시인의 서정성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현대시는 복잡한 서정의 집합이다. 오늘 읽어 보는 강순 시인의 시도 친절한 서정시는 아니다. 굳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저 그런 서정에서 훨씬 벗어나 있다.
강순 시인의 시는 대체로 길지만 거침없고 단정하다. 어쩌면 거침없이 단정하다는 말이 모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침없는 시를 잘 받치고 있는 내재율은 조율 잘된 악기처럼 맑은 소리를 낸다. 언제부턴가 형편없는 시가 서정이란 말로 포장되어 범람의 수준으로 유통되는 것을 본다.
시를 쓰는 일이 고귀하거나 순도 높은 예술적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울게 없다면 구태여 쓸 필요도 없는 일이다.
시의 예술적 가치는 남과 다름에 있다.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강순의 시는 시에 합당하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에게 엄격한 시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시 한 편을 읽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세상을 자꾸만 들여다보아서 무엇하겠나. 강순 시인의 오늘의 처방전이 시를 읽고 쓰는 누군가에게 좋은 처방전이길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