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茶 그리고 향기] 침착하게 사랑하기 / 차도하(1999~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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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茶 그리고 향기] 침착하게 사랑하기 / 차도하(1999~2023)
  • 김명기 시인
  • 승인 2023.11.06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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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하게 사랑하기 / 차도하(1999~2023)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저를 저렇게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저분들 싸우나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쉼표] 가끔 문인들의 부고(訃告)를 받습니다. 대체로 저보다 훨씬 선배인 문인들의 부고입니다만, 근래 받은 차도하 시인의 부고는 유난히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 겨우 이십대 초반이고 곧 나올 첫 시집이 유고시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시는 차도하 시인의 202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입니다. 이제 막 활동을 시작했던 시인이라 많은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첫 시집에 어떤 시들이 있을지 궁금했지만 이제 이 어린 시인은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연이 자꾸만 마음에 걸립니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그렇게 신은 재능있고 생기 넘쳤던 젊음을 뺏어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시는 ‘어떤 것이다’라는 개념이 흐려진 것은 꽤 오래된 일입니다. 이미지보다는 다소 도발적이고 몽환적인 시가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엿보입니다. 좀 더 낯설고 신선한 시를 쓰는 것이 젊은 시인들의 책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차도하 시인의 부고는 새로운 시의 부재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시인의 명복(冥福)을 빌며 독자들의 안녕(安寧)도 함께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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