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茶 그리고 향기] 지그시 / 김해자(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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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茶 그리고 향기] 지그시 / 김해자(1961~)
  • 김명기 시인
  • 승인 2023.10.27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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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시 / 김해자(1961~)

소나기 몇 줄금 지나간 어스름 옥수수 몇 개 땄지요 흘러내리는 자주와 갈빛 섞인 수염, 아무렇게나 겹겹 두른 거친 옷들 한 겹 두 겹 벗기다 그만 그의 연한 병아리 빛 속 털 보고 만 것인데 무게조차도 없이 그저 지그시, 알알이 감싸고 있는 한없이 보드라운 속내 만지고 만 것인데요, 진안 동향면 지나다 왜가리 숲 아주 오랫동안 바라본 적 있어요 소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왜가리들, 꼼짝 않고 있는 새들은 모두 알을 품고 있었죠 폭우가 쏟아져도 한 자리에서 지그시, 입과 날개 거두고 지그시, 소중한 것 깊이 품어본 자들은 알죠 왜 한없이 엎드릴 수밖에 없는지, 왜 한사코 여리고 보드라워질 수밖에 없는지, 왜 하염없이 그를 감싸줄 수밖에 없는지, 사랑은 그런 것이다, 지그시 덮어주는 일에 골몰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게 사랑이다, 혼자 중얼거리며 온갖 생각도 지우고 지그시, 중얼거림도 멈추고 그냥 지그시

[쉼표] 김해자 시인의 시는 사실과 현실을 환기 시키고 확장시킵니다. 옥수수 몇 개 따다가, 왜가리 숲을 바라보다가 지그시 감싸고 있는 것들의 힘을 생각합니다. 때때로 인간의 사랑은 유별나서 사랑의 방식에서 멀어지는 짓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자식의 폭력을 온갖 방법으로 두둔하는 부모나 사랑을 빙자해 사회적 해를 끼치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비애를 느끼곤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김해자 시인의 ‘지그시’라는 시는 사랑의 가장 원형적이고 근본적인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지그시 그러나 폭우가 쏟아져도 굳건하게 버티며 품어 내는 일이란 걸. 사랑은 끈질김일 수는 있지만 오욕이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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