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茶 그리고 향기] 가을 / 고정희(1948~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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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茶 그리고 향기] 가을 / 고정희(1948~1991)
  • 김명기 시인
  • 승인 2023.09.0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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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 고정희(1948~1991)
 

내 속에 깊이깊이 잠든 그대가

흐르는 바람 저쪽에서 회오리치는 날은

누가 내 혼의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고 간다

비탈길 느릅나무에 불이 붙는다

넋을 박은 가로수에 불이 붙는다

산의 이쪽, 대안의 푸른 욕망을 나부끼는

관목숲에 서서히 번져드는 불, 불길

드디어 산이 불타오르고 그대여,

산처럼 큰 정적이 불타는 10월 오후에

그대 미세한 음성이 불타고 있다

내 핏줄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고

내 혼 어디에도 채울 수 없는 누가

내 모든 어둠의 확을 열고

찬란한 불길을 오관에 켜고 있다

아아, 멀리서 진혼곡 같은 바람이

불살을 흔들고 있다

[쉼표] 한여름 무더위를 잘들 견디셨는지요. 이제 서서히 더위도 꺾이고 가을이 오겠지요. 오늘은 고정희 시인의 ‘가을’이란 시를 소개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명사의 제목을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계절을 제목으로 쓰면 자칫 시적 범위가 너무 광범하게 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인 고정희의 시는 서사적이며 사회부조리에 대한 저항의식이 짙게 깔린 시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소개한 시는 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서정이 깊게 서린 시를 소개합니다.

이 시는 서서히 가을빛으로 변하는 대지와 산을 불길이 번지는 모습으로 이미지화했습니다. 천천히 시를 읽어 내려가면 높은 산 정상으로 번져가는 가을 산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시는 문장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직은 뜨거운 열기가 남아있는 초가을입니다만 곧 초록초록한 잎들이 불처럼 타오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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