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茶 그리고 향기]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용악(1914~1971)
상태바
[詩와 茶 그리고 향기]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용악(1914~1971)
  • 김명기 시인
  • 승인 2023.08.21 11: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용악(1914~1971)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고 없었고,

아무을만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는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 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리켰다.

때늦은 의원이 아모 말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의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쉼표] 이용악은 동시대 시인인 백석에 비해 너무 저평가된 시인이다.
그 이유는 그가 좌익문이이었다는 점과 월북문인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그의 작품이 금서였기 때문이다.
북방의 언어를 시에 차용했다는 점과 이산자의 슬픔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지만, 이용악은 잘 호명되지 않는다.
이 시를 읽으면 자연히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떠오른다. 이 쓸쓸함과 애잔함이라니. 슬그머니 이용악의 손을 잡고 위로가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해주고싶다.

풀벌레 소리를 듣다가 이국 땅에서 침상도 없이 숨진 이용악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이용악이 조선문학가동맹(카프)에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경성이다. 백석처럼 이용악도 고향으로 돌아갔을 뿐인데 여전히 그를 월북시인이라고 부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