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茶 그리고 향기] 버려진 목숨과 함께 사는 일 / 김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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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茶 그리고 향기] 버려진 목숨과 함께 사는 일 / 김명기
  • 김명기 시인
  • 승인 2023.06.1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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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목숨과 함께 사는 일 / 김명기

봄 같은 날이다. 봄 바다 위로 쏟아지는 볕은 분명 봄볕이다. 꽃나무가 꽃을 피워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이월 하순. 입춘이 지났으니 마음이 봄 앞으로 옮겨 앉는다. 마당만 맴도는 봄이를 데리고 함께 봄 바다 곁을 걸었다. 오년 전 어느 봄날 산책 중인 엄마를 따라 지친 몸으로 마당에 들어 온 봄이. 그렇게 ‘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봄이는 우리 집에서 사는 여섯 번째 유기동물이다.

이십년 전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 올 때 함께 온 녀석들이 있었다. 코카스페니얼 혼종인 똘똘이와 풍산개 백산이, 두 녀석은 자기 명을 다하고 떠났다. 그리고 엄마는 버려진 채 상처투성이가 된 코카스페니얼, 칼을 치료해 집에 데려왔고, 어느날 제 발로 찾아 온 마오가 칼의 집에 눌러앉는 바람에 다시 집 한 채를 지어 두 녀석을 거두었다. 칼과 마오라는 이름은 내가 지은 이름이다. 삼십 대 중후반, 득세하는 극우의 꼴이 하도 보기 싫어 집에 든 두 녀석의 이름을 극좌주의 이름으로 지었다. 칼 마르크스와 마오저뚱의 약자다.

두 녀석은 이 집에서 사오년을 살다 떠났다. 마오가 먼저 떠나고 아버지가 떠났다. 아버지와 각별했던 칼은 아버지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일 년 동안 아침마다 현관 앞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렇게 늙어버린 칼은 아버지와 함께 다니던 산책길 개울에서 죽은 채 떠 있었다. 마오는 벚나무 밑에 칼은 밤나무 밑에 묻었다.

다시는 산 것을 집에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버려진 것들은 오지의 마가리 마당으로 자꾸만 찾아 들었다. 유기견 복순이가 와서 삼 년 남짓 살다가 왕벚꽃 나무 아래 묻혔고, 어린 고양이 바다를 갯바위에서 구조해 왔고 어린 고양이 말래는 열린 거실 창문을 태연히 넘어와 눌러앉았다. 고양이들은 두 녀석 모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바다는 세 살이 안 된 나이였고 말래는 네 살이었다.

말래와 봄이는 함께 살았다. 오누이 같았다. 말래에게 갑작스런 하지마비가 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두 녀석은 그렇게 살고 있을 터인데, 아쉽게도 말래는 이 집 나무 아래에도 묻히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유독 개나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그 두 종은 오랜 세월 사람의 곁에서 함께 살아온 동물이다. 그러니 그들의 목숨은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사람이 좋아 사람 곁으로 오는 애들을 굳이 쫓아낼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봄이는 차에 오르는 걸 무서워한다. 차에 오르는 순간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차에 오르면 자기를 버린 예전 사람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다. 누군가 봄이를 차에 태워 다니다 어느 날 차에 태워 이 외딴 마을에 버리고 갔으니, 봄이 에게 차라는 공간은 버림받는 시간으로 거슬러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사람을 따르던 길고양이를 잔인하게 죽였다고 한다. 동물보호소에 근무하는 동안 학대당하다 버려진 개를 너무 많이 봤다. 그래도 그들은 또 사람에게 곁을 내어준다. 그것이 그들의 유전자 구조인지도 모르겠다. 고양이를 죽여서 기르던 개를 버려서 불안과 불만이 사라진다면 그런 생은 또 얼마나 위태로운가. 나는 거창하게 동물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적어도 사람 곁에서 수천년 함께 살아온 목숨은 그냥 사람과 같은 목숨일 뿐이다. 그것을 죽이고 버리는 짓은 사람에게 하는 짓과 다를 바 없다. 거둘 것이 아니라면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면 된다.

바다와 바다 위로 스러지는 볕이 한없다. 봄이와 나는 두어 시간 봄을 가불해 썼다. 차 타는 것만 아니라면 봄이는 내 옆에서 마냥 좋은 목숨이다. 그러나 다시 차에 몸을 싣고 집 마당에 당도할 때까지 이 작은 몸은 얼마나 두려울까. 목줄을 놓아도 내 발만 부지런히 쫓아오는 몸을 돌아보다가 봄이에게 말했다. 괜찮아, 이제 너를 버리는 사람은 없을 거야. 우리 조금만 더 자주 봄 바다 보러 오자. 곧 나무들이 꽃무늬 수다를 풀어놓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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