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茶 그리고 향기] 순한 골목 / 박한(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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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茶 그리고 향기] 순한 골목 / 박한(1985~)
  • 김명기 시인
  • 승인 2023.05.15 1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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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한 골목 / 박한(1985~)

골목은 왜 이리 얌전한지

자꾸만 쓰다듬고 싶어요

숨을 쉬는데

신호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손가락 마디를 보면

내가 헤맸던 길목을 알 수 있죠

매일 걸어 다녀도

달이 지는 법은 배울 수가 없어요

사실 골목은 지붕들이 기르는 것이라서

부르는 이름들이 달라요

고장 난 컴퓨터였다가

산지 직송 고등어였다가

김숙자 씨였다가

지현이 엄마였다가

가끔은 현석아 놀자가 돼요

왜 골목이

밤이면 군데군데 멍이 드는지

술 취해 돌아오는 일용직

김기석씨를 보면 알죠

그래도 골목은 도망치지 않습니다

쫓기는 사람들이

모두 골목으로 숨어드는지는

좁아야만 이해하는 습성

나도 쫓아오는 생활을 따돌리고

골목에서 뒷발로만 서 봅니다

창밖에선 내가 걸어가고 있고요

멀리 돌아갈 수 없는

직선이 없는 지도는

여기에서 발명 되었습니다

깨우지 마세요

난폭하진 않지만 겁이 많은 사람들이

불빛을 말고 숨어버릴지도 몰라요

쫑긋 세운 옥상들이 바람을 듣고 있습니다

[쉼표] 첫 시집은 앞으로 이 시인의 향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물론 시집도 진화해야 하지만 첫 시집의 이미지는 오래 남는다. 시집 “기침이 나지 않는 저녁”은 박한 시인의 첫 시집이다.

오늘은 시인 박한의 등단작품인 순한 골목을 소개한다. 하지만 시집을 열고 그의 여는 시와 두번째 시인 ‘빈배’와 ‘뒤집힌 꽃잎을 몇 번이나 읽었다. 아마도 내겐 시인 박한은 이 두편의 시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두 편의 시를 읽는 동안 박한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 눈높이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세월호에 대한 많은 시를 읽었지만 박한의 시 두 편은 마냥 넘치는 슬픔보다 위로와 따뜻함이 짙다. 슬픔은 마땅히 위로 받아야 한다. 그러나 세월호는 너무 큰 슬픔이어서 사회적 위로가 쉽지 않다. 박한의 시는 큰 슬픔에 집중하기 보다 시간이 흐른 후의 슬픔에 대한 위로의 시선으로 읽힌다.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의 시선이 겹치면서 서로가 서로를 안스러워 하는 마음이 잘 표현된 시다. 뒤편의 시 몇 편도 좋은 시가 많다. 앞으로의 시가 변화 하는 건 당연하지만 시인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함을 오래 간직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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