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한 골목 / 박한(1985~)
골목은 왜 이리 얌전한지
자꾸만 쓰다듬고 싶어요
숨을 쉬는데
신호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손가락 마디를 보면
내가 헤맸던 길목을 알 수 있죠
매일 걸어 다녀도
달이 지는 법은 배울 수가 없어요
사실 골목은 지붕들이 기르는 것이라서
부르는 이름들이 달라요
고장 난 컴퓨터였다가
산지 직송 고등어였다가
김숙자 씨였다가
지현이 엄마였다가
가끔은 현석아 놀자가 돼요
왜 골목이
밤이면 군데군데 멍이 드는지
술 취해 돌아오는 일용직
김기석씨를 보면 알죠
그래도 골목은 도망치지 않습니다
쫓기는 사람들이
모두 골목으로 숨어드는지는
좁아야만 이해하는 습성
나도 쫓아오는 생활을 따돌리고
골목에서 뒷발로만 서 봅니다
창밖에선 내가 걸어가고 있고요
멀리 돌아갈 수 없는
직선이 없는 지도는
여기에서 발명 되었습니다
깨우지 마세요
난폭하진 않지만 겁이 많은 사람들이
불빛을 말고 숨어버릴지도 몰라요
쫑긋 세운 옥상들이 바람을 듣고 있습니다
[쉼표] 첫 시집은 앞으로 이 시인의 향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물론 시집도 진화해야 하지만 첫 시집의 이미지는 오래 남는다. 시집 “기침이 나지 않는 저녁”은 박한 시인의 첫 시집이다.
오늘은 시인 박한의 등단작품인 순한 골목을 소개한다. 하지만 시집을 열고 그의 여는 시와 두번째 시인 ‘빈배’와 ‘뒤집힌 꽃잎을 몇 번이나 읽었다. 아마도 내겐 시인 박한은 이 두편의 시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두 편의 시를 읽는 동안 박한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 눈높이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세월호에 대한 많은 시를 읽었지만 박한의 시 두 편은 마냥 넘치는 슬픔보다 위로와 따뜻함이 짙다. 슬픔은 마땅히 위로 받아야 한다. 그러나 세월호는 너무 큰 슬픔이어서 사회적 위로가 쉽지 않다. 박한의 시는 큰 슬픔에 집중하기 보다 시간이 흐른 후의 슬픔에 대한 위로의 시선으로 읽힌다.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의 시선이 겹치면서 서로가 서로를 안스러워 하는 마음이 잘 표현된 시다. 뒤편의 시 몇 편도 좋은 시가 많다. 앞으로의 시가 변화 하는 건 당연하지만 시인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함을 오래 간직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