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茶 그리고 향기] 미안의 안녕 / 김중일(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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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茶 그리고 향기] 미안의 안녕 / 김중일(1977~)
  • 김명기 시인
  • 승인 2023.04.17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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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의 안녕 / 김중일(1977~)

마침내 나는 오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기후를 가졌다. 봄비가 눈으로 뒤바뀌었고 우산은 비와 눈 사이에 꽂혀 있다. 가장 높은 하늘을 나는 도중 정전처럼 불시에 숨이 끊긴 새들의 찰나를 드디어 나도 가지게 되었다. 오랫동안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은 내 가슴속으로 조금씩 스며들어 흔적이 없다. 나는 온몸을 샅샅이 뒤져 꽃다발을 찾다가 우연히 누가 놓고 간 우산을 주웠다. 구름들과 한 우산 속에서 어깨를 겯고 광화문 앞 희뿌연 폭설을 뚫으며 걸었다. 유빙처럼 표류하던 버스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한가닥의 자일을 그러잡 듯 우산 하나씩 꼭 붙잡았다. 오직 터진 허공 같은 우산을 악착같이 붙잡은 사람들만 서서히 녹아 가라앉고 있었다. 이토록 가엾고 선량한 우산을 언젠가 제 손으로 고이 접어 잃어버릴 수 있도록 오늘만은 놓치지 않게 꼭 붙잡고 있었다. 내 우산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무모하다. 우산과 함께 유실될 것이기 때문이다. 건네지 못한 커다란 꽃다발 같은 우산을 잃어버리고 나는 돌이킬 수 없는 무지개를 가졌다. 내 이별은 안녕을 가지게 되었다. 대신 내 미안은 안녕을 가지지 못했다.

[쉼표] 김중일의 시는 한번에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문장에 함의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같은 문장이 미문처럼 보이기도 하고 건조해 보이기도 하고 슬퍼 보일 때도 있다. “이를테면 정전처럼 불시에 숨이 끊긴 새들의 찰나를 드디어 나도 가지게 되었다.” 같은 문장은 어떤 슬픔에 대해 담담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비유는 아름답다.
슬픈 문장을 미문으로 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사유를 오래도록 들여다보다가 어느 순간 한 문장으로 끄집어내는 일.

현대사회의 일상은 시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활동이 한 단면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것은 사회의 다양성과 맞물리며 확장되고 증폭된다. 그러므로 어떤 시가 어렵다고 해도 시의 문장을 찬찬히 되짚어 읽어보면 시인의 사유를 짐작할 수도 있다.
시는 쓰는 일과 읽는 일의 반복이다. 많이 읽으면 시를 보는 눈도 밝아질 수 있다. 오늘 김중일 시인의 시를 소개하는 것은 시대의 슬픔을 외면하거나 잊어버리기보다 자신만의 문장으로 기록하는 시인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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