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2] 북면 ‘구수곡’의 구는 ‘아홉 구(九)’가 아니라 ‘거북 구(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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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2] 북면 ‘구수곡’의 구는 ‘아홉 구(九)’가 아니라 ‘거북 구(龜)’였다
  • 전석우
  • 승인 2023.04.10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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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현용 (울진군청 학예연구사, 울진군 지명위원회 위원)

<편집자 주>

울진군은 2001년부터 구수곡 자연휴양림(九水谷 自然休養林)을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알려진 구수곡의 지명 유래와 달리 ‘거북[龜]이 지키고 있는[守] 곳[洞]’이라 하여 ‘구수동(龜守洞)’이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주민이 있다. 북면 덕구 1리에 살고 있는 민봉기(1944년생)씨는 어릴 때부터 성묘할 때 어른들로부터 산 모양이 거북처럼 생겨서 거북이 지키는 곳이라 하여 ‘구수동’이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고 한다. 민씨는 구수곡 자연휴양림 개장 당시부터 ‘九水谷’으로 잘못 표기된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여러 차례 군청 산림과에 이의제기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 심현용 울진군청 학예연구사(울진군 지명위원회 위원)이 본지에 보내온 「북면 ‘구수곡’의 구는 ‘아홉 구(九)’가 아니라 ‘거북 구(龜)’였다」 주제의 특별 기고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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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필자는 민씨 족보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2022년 6월 13일 울진군 산림힐링과(현, 산림과) 이해용씨, 풍수지리 전공자인 영덕 고래산 연화사 석수예 주지스님(영남대 풍수지리 박사과정 수료)과 함께 민봉기씨의 안내를 받아 민선의 묘가 있는 곳을 직접 답사하였다. 그곳에는 실제로 민선의 묘와 그의 손자 민성택의 묘가 위․아래로 나란히 조성되어 있었다. 또 민선의 신 묘비와 구 묘비도 확인할 수 있었다.(사진 4)

민선의 구 묘비는 2007년 새 묘비를 설치하면서 구 묘비는 땅에 묻었었는데, 민봉기씨와 이해용씨가 2022년 4월 24일(일) 미리 현장에 가서 구비를 다시 파내어 노출시켜 두어서 조사를 쉽게 할 수 있었다. 민선 구비는 낡고 마멸되고 또 파손되어 있어서 명문을 자세히 판독할 수 없었다. 하지만 “學生驪興閔公之墓/ 附孺人開城金氏(앞) … 嘉慶十二年十二月二十九日 … 立碑(뒤)”등을 판독할 수 있었다. 민선 구비에서 ‘가경 12년(1807, 순조 7)’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구비는 ‘1807년 이후’에 세웠다.

일반적으로 묘를 조성하면서 비도 같이 세우는데, 민선이 죽은 1729년(영조 5)에 묘와 함께 비를 설치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1729년에 비를 세웠다면 그 비가 낡아서 1807년 이후에 다시 세웠을 것이며, 아니면 처음부터 묘비를 설치하지 않았다가 1807년 이후에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어느 것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사진 4〉구수곡 내 속등의 묘와 민선의 구 묘비

현재 민선의 구비가 심하게 마멸되고 파손되어 있어서 비문에서 ‘龜守洞’이라는 단어를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민씨 족보의 기록처럼 이곳에 민선의 묘가 조성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주변 지형도 거북을 닮은 모양의 ‘속등(해발 약 336.7m, 경북 울진군 북면 상당리 산1번지)’이 있었으며, 이 속등 좌․우로 물이 흘러 앞에서 구수곡 본류의 계곡천으로 합수(合水)되었다. 이는 흡사 거북이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지도 3․4)

〈지도 3〉구수곡 내 ‘속등’의 위치(출처 : 다음 지도, 흰 점선이 거북 모양임)
〈지도 3〉구수곡 내 ‘속등’의 위치(출처 : 다음 지도, 흰 점선이 거북 모양임)
​〈지도 4〉구수곡 내 ‘속등’의 위치(S=1:10,000)(붉은 동그라미가 민선의 묘 위치, 노란 굵은 선이 거북 모양임)
​〈지도 4〉구수곡 내 ‘속등’의 위치(S=1:10,000)(붉은 동그라미가 민선의 묘 위치, 노란 굵은 선이 거북 모양임)

보통 지명은 주변의 지형이나 그곳에 있는 어떤 사물의 형태를 보고 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속등’이라는 산이 거북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거북이 계곡을 지킨다[龜守洞]고 하였거나 속등 주변으로 계곡 물이 흐르고 있으므로 거북이 물을 마시고 있는 계곡[龜水谷]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즉 지형을 본 따서 지명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민씨 문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대로 이곳에 거북 모양의 산(속등)이 있어 거북이 지킨다는 설은 타당성이 있다. 또한 이를 증명해주는 기록이 사료 ②의 『여흥민씨파계 지후공파 울진』(1922)과 사료 ①의 『조선지지자료』(1911)에 적힌 ‘거북 구(龜)’이다.(사진 2․3․5)

일반적으로 족보에 기록된 내용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조상의 묘소를 기록한 위치는 신빙성이 높다. 특히 사료 ①의 『조선지지자료』(1911)는 조선총독부가 우리나라 전국의 지명을 조사하여 1911년 작성한 지리정보이다. 1910년 초에 대한제국에 설치된 토지조사국은 조선총독부에서 임시토지조사국으로 개칭되어 토지조사사업을 주도했는데, 이 『조선지지자료』(1911)는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으로 선행 조사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마을, 산, 하천 등에 관한 한자 지명뿐만 아니라 순한글 지명까지 밝히고 있어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사진 5)

〈사진 5〉『조선지지자료』(1911) 강원도 울진군 원북면 ‘구수곡(구시골)’
〈사진 5〉『조선지지자료』(1911) 강원도 울진군 원북면 ‘구수곡(구시골)’

한편, 아홉 골[九谷]의 지명은 사료 ③인 『조선환여승람 울진군』(1937)에서 처음 나온다.(사진 6) 여기서 “구수곡수(九水谷水)는 응봉산 아래에서 나와서 읍내천에 합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늦어도 1937년에 갑자기 구수곡의 유래가 거북[龜]에서 아홉 구(九)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후 사료 ④인 『울진군지』(1938․1939)에서도 그대로 사용되면서 모두 ‘9골’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사료 ⑤인 『한국지명총람 7(경북편 Ⅳ)』(1979)에서 아홉 골에서 나오는 물이 흐른다고 지명에 대한 유래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또 사료 ⑦인 『경북마을지(상)』(1990)에 ‘아홉 골[九谷]’의 이름이 처음으로 모두 제시되었으며, 이후 사료 ⑨인 『울진의 설화』(1998)에서도 모두 기록되었다. 즉 이 아홉 골(9곡)은 ‘용문터(용문터골), 제당골(제단골), 엘기골(엔기골), 끔억쏘골(끔억솔골), 절터골(점터골), 옷밭골, 옹달골, 보수골, 작은구소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구수곡 안에서 큰 골을 형성하고 있는 ‘수골, 검은소골’은 9골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이 9곡[九谷]과 관련된 지명 유래는 1937년을 전후하여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또 이 계곡에는 이름도 없는 작은 골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단지 9골로서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는 분명 거북 ‘구’와 숫자 아홉 ‘구’의 발음이 같은 ‘구’여서 생긴 현상일 것이다.

〈사진 6〉『조선환여승람 울진군』(1937) 산천 ‘구수곡수’

그리고 사료 ⑩의 『울진군지』(2001)는 앞 시기의 사료 ①인 『조선지지자료』(1911)와 사료 ②인 『여흥민씨파계 지후공파 울진』(1922)을 보지도 못하고 사료 ③과 사료 ④를 비롯한 그 이후의 기록들만 보고 ‘九水谷’이라는 지명을 무비판적으로 옮겨 적은 것 같다.

그러므로 구수곡과 관련된 문헌기록은 사료 ①의 『조선지지자료』(1911)에 기록된 ‘龜水谷’이 가장 빠른 것이 아니라 민씨 문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1922년에 작성되었지만 사료 ②의 『여흥민씨파계 지후공파 울진』을 더 빠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민선의 묘가 조성되는 1729년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구수곡의 한자 지명은 앞에서 설명한 龜水谷(1911년) → 龜守洞(1922년) → 九水谷(1937년)의 순으로 변경된 것이 아니라 龜守谷(1729년 이전) → 龜水谷(1911년) → 九水谷(1937년) 순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구수곡은 1729년 이전부터 처음에 ‘龜守谷’으로 불리어오다가 늦어도 1911년에 ‘지킬 수(守)’가 ‘물 수(水)’로 바뀌어 ‘龜水谷’이 되었으며, 그러다 늦어도 1937년에 ‘거북 구(龜)’가 ‘아홉 구(九)’로 바뀌어 다시 ‘九水谷’으로 변경되어 지금까지 사용되었다. 이와 연동하여 ‘九水谷’이라는 한자 지명에 맞추어 아홉 골[九谷]에서 물[水]이 흘러나와 합쳐져 흐른다는 새로운 지명 유래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결국, 처음에는 이곳의 지형(일명 ‘속등’이라는 산)이 거북과 닮아있어서 ‘거북이 지키고 있는 계곡[龜守洞(谷)]’으로 지명이 알려져 오다가 ‘거북이 물을 마시고 있는 계곡[龜水谷]’으로 변경되고 다시 ‘아홉 골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계곡[九水谷]’으로 바뀌게 되어 구수곡 원래의 뜻과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던 것이다. 龜守와 龜水는 거북과 관련된 계곡[洞․谷]으로 같은 의미를 나타내지만 九水는 전혀 다른 뜻이다.

Ⅳ. 맺음말

이상으로 울진군 북면에 있는 ‘구수곡’의 한자 지명과 그 유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구수곡의 유래가 아홉 골[九谷]의 물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거북[龜]과 관련된 지형에 의해 생긴 지명이라 한 민봉기씨의 증언에서 이 구수곡의 지명을 검토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민씨 문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거북’설이 관련 족보와 다른 문헌기록에서도 확인되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구수곡의 한자 지명과 유래가 달랐음이 밝혀졌다.

또 이 구수곡의 한자 지명이 여러 번 변경되는 과정을 겪은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구수곡의 한자 지명은 ① 龜守谷(1729년 이전) → ② 龜水谷(1911년) → ③ 九水谷(1937년)으로 바뀌어 원래의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구수곡의 지명 유래는 원래 ‘속등’이라는 산의 지형이 거북을 닮아서 생긴 것으로 파악되었다. 거북은 장수의 동물로 신령한 동물에 해당되며 풍수지리에서도 거북이 알을 많이 나아서 자손번영과 번창의 뜻이 함축되어있다. 이러한 뜻이 함께 지명에 스며들어 구수곡이라는 지명을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에 어떠한 사유로 한자 지명과 그 유래가 변경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바뀐 구수곡의 한자 지명과 유래를 원래의 뜻대로 “신령스러운 거북이 지키고 있는 계곡[龜守谷]” 또는 “거북이 물을 마시고 있는 계곡[龜水谷]”으로 바로 잡아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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