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옥방의 과거와 현재, 사진과 기록으로 본 옥방의 역사 ‘울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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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옥방의 과거와 현재, 사진과 기록으로 본 옥방의 역사 ‘울림 있었다’
  • 김지훈
  • 승인 2021.11.04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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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 31. 옥방교회 선교관에서 전시

『지나간 시간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회한의 시간으로,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옥방마을 주민들에게 지난 시간들은 어떤 추억으로 남아 있을까요? 셀 수 없이 많은 날들을 살아오며 경험했던 기억들이 모두 즐거울 수만은 없겠지요. 게다가 그 경험들은 결코 내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기억들을 슬픔과 고통의 기억의 방에 넣어 둘 것인지, 나를 성장시켰던 행복한 기억의 방에 넣어 둘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들을 아름다움과 따뜻한 기억의 방으로 옮겨, 지금과 앞으로의 삶이 조금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옛사람들은 이제 없지만 마을은 남아 있고, 우리의 희망도 여전하며 우리의 자녀들은 성장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고, 슬픔과 고통 즐거움이 뒤섞여 있는 나와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과거가 있기에 지금이 있고, 지금이 있기에 미래가 있습니다. 이번 <옥방 역사 전시회>가 서로를 보듬고 살아가는 우리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가는 또 하나의 추억이 되기를 바랍니다.(전시를 열며... 옥방교회 박현기 목사 글 중에서)』

박현기 목사가 전시의 취지와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2년째 옥방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박현기 목사가 전시의 취지와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2년째 옥방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옥방의 지난 70년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돼 ‘울림이 있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지난 10월 17일부터 31일까지 옥방교회 선교관에서 진행된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옥방의 역사 전시회’가 지역민은 물론 출양인들에게 깊어가는 가을이 남기는 여운처럼, 잔잔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전시는 ‘광산, 마을, 교회’ 3개 부문으로 짧지만 함축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이 역력했다. 전시된 사진과 기록은 대부분이 교회에서 소장하고 있었고, 일부 주민들이 협조했다고 박현기 목사는 전했다.

▢ ‘광산’ 부문에서는 옥방광산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자료에 따르면 옥방광산은 대한민국 5대 중석 광산의 하나로 1956년에 439톤의 중석을 생산 최고점을 찍고 이후 산업구조의 변화와 생산량의 감소로 1980년 후반 폐광됐다고 한다.

박 목사는 “당시 옥방 인근은 옥방광산의 성업으로 약 1200세대 5천여명 이상의 주민이 생활했었다. 그러나 당시 광산 종사자의 임금은 도시근로자의 절반수준(1982년 옥방노동자 월 평균 임금이 14만원, 도시근로자가 29만원)으로 삶은 고단하고 혹독한 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옥방광산노동조합에 관한 자료가 눈길을 끌었다.

▢ ‘마을’ 부문에서는 ‘봉화와 울진의 경계, 분천과 광회가 옥방천을 사이에 두고 마을이 시작됐으며, 100년 전 옥방으로 불리웠다’고 안내한다. 광산이 성업 중이던 당시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400명이 넘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아이들이 골목골목 뛰어다니며 떠들썩했을 마을 풍경이 지금과 사뭇 비교된다.

옥방천을 따라 형성된 시가지엔 약방, 당구장, 다방, 이발소, 술집, 미장원, 양복점, 구멍가게들이 줄을 이었고, 광업소 노임이 지급되는 월말에는 마을들머리에서 옥방중학교까지 장(場)이 열렸다. 광산노동자들은 주로 출렁다리 근처 사택에 기거하거나 옥방천 양쪽의 산비탈 판잣집에서 살았다. 광산이 폐광되면서 거의 마을을 떠나고, 새로운 삶터를 찾아온 이들이 더해져 2020년 현재 옥방마을에는 62가구(분천 26, 광회 36)가 살아가고 있다.

주목할 것은 옥방국민학교에 대한 소개이다. 옥방광업소의 재정 지원으로 학교 설립에 착수, 1952년 12월 1일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9번지에서 옥방국민학교가 3개 학급으로 개교, 1957년 11학급으로 확대됐고, 1962년 남회룡분교 개설, 1971년 광동국민학교와 병합 옥방천 건너편 울진땅으로 자리를 옮겼다. 광산 경기가 하향세인 1981년에도 197명의 학생이 있었다.

한편 신문(동아일보) 기사를 스크랩한 자료가 눈에 띈다. ‘가난한 광산촌의 옥방분교 하키팀, 4강 진출 고교 진학 꿈 부풀어’라는 제목으로 학생들이 쉬는 시간 오이를 먹는 사진을 싣고 있다.

▢ ‘교회’ 부문은... ‘옥방교회는 광산 노동을 위해 이주해 온 노동자와 토박이가 마음을 합해 1951년 전쟁 중 옥방초등학교 뒷산에 초가를 짓고 예배를 드리며 시작됐다.’ 1954년 나무판자를 덧대어 예배당을 증축했으나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한때는 아동부가 120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폐광을 앞둔 1982년 6월 옥방광업소 의무실을 사서 예배당을 옮김으로써 산 중턱에서 마을로 내려왔다. 1997년 전기 누전으로 교회당이 전소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현 교회는 교인들이 힘을 모아 신축됐다.

박현기 목사는 “전시를 준비하고 마무리하면서 자료들이 너무 의미있고 소중해 상설전시장을 계획하고, 자료를 바탕으로 책으로 발간할 예정이다”며, “옥방 마을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마을의 가치가 소중하다. 마을이 보다 활성화될 수 있는 지역 커뮤니티센터를 만들어 더불어 살아가는 가치의 소중함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지역민들로 구성된 ‘옥방에 살어리랏다와 옥방교회’가 주최하고 마을공동체 만들기와 활동을 돕는 봉화군의 지원을 받아 진행됐으며, 봉화군 농촌활성화지원세터의 적극적인 도움과 봉화지역역사박물관사회적협동조합이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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