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문무대왕의 해양개척정신 후손에게 물려줄 ‘소중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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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문무대왕의 해양개척정신 후손에게 물려줄 ‘소중한 유산’
  • 전석우
  • 승인 2020.08.27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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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동해산업연구원 교육문화부 곽낙원 연구원
환동해산업연구원 교육문화부 곽낙원 연구원

지난 7월 31일에 경상북도에서 주최하고 환동해산업연구원에서 주관한 ‘제2회 문무대왕 해양대상’이 개최되었다.

문무대왕 해양대상은 해양 관련 과학, 산업, 교육문화 분야에서 그 업적이 탁월한 인물과 단체를 발굴해 시상한다. 문무대왕의 호국, 위민, 해양개척 정신을 동해정신으로 승화시켜 일류 해양국가 건설에 도움을 주고자 지난해 제정되었다.

처음 문무대왕 해양대상 시상식 업무를 맡아 진행한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을 때만해도 문무대왕?... 누구지?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은데... 라고 속으로 생각했던 것이 지금은 그 이름이 매우 친숙하게 들린다.

그렇게 문무대왕과 처음 인연(?)을 맺고 바쁘게 수상 후보자들을 모집하며 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사업도 사업이지만 주관 부서로서 문무대왕에 관해 전혀 모르고 사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문무대왕에 관해 조사해 보기 시작했다.

지난달 31일 울진 국립해양과학기술원(KIOST) 동해연구소에서 열린 ‘제2회 문무대왕해양대상 시상식에서 기념촬영하는 이철우 경북도지사(왼쪽)과 문무대왕 해양대상 수상자들.
지난달 31일 울진 국립해양과학기술원(KIOST) 동해연구소에서 열린 ‘제2회 문무대왕해양대상 시상식에서 기념촬영하는 이철우 도지사(오른쪽 2번째)와 문무대왕 해양대상 수상자들.

문무대왕 김법민은 661년 6월, 자신의 부친인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통일을 보지 못한 채 59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그의 뒤를 이어 36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룬 왕이 김춘추로 잘 못 알고 있는 분들도 있지만 삼국통일은 그의 아들 문무대왕 김법민이 이루었다.

문무대왕은 일국의 왕자로 태어나 궁궐에서 고이 길러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25세 때 이미 군사외교를 위해 당 고종을 만났고, 아버지가 왕위에 올라 태자가 된 후에도 전쟁터에서 말을 달린 남자였다.

그의 시호가 문무왕(文武王)이었다는 것은 그가 문과 무에 능한 임금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만약 무열왕 사후에 김법민이라는 군주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당시 한반도는 당의 야욕대로 그들의 식민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또한 여러 역사에서 말해주듯 김유신이라는 희대의 인물이 정권을 찬탈할 수도 있었지만, 군주로서 뛰어난 정치력과 통솔력으로 인해 30살 이상 차이 나는 김유신과 훌륭한 군신관계를 이루었다.

짧은 견해로 역사를 받아들일 때에는 그저 신라가 대국인 당의 힘을 빌려 쉽게 삼국을 통일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역사를 알아갈수록 결코 그가 쉽게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당은 신라를 도와주는 척 했지만 결국 신라를 앞세워 한반도 전체를 식민지화 하려 했고, 백제 부흥군의 저항, 고구려의 저항, 심지어 바다건너 왜국까지 신라를 견제하는 상황과 싸워야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여러 어려움들 속에서도 문무대왕은 결국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고, 이후 당과의 전쟁에서 육상의 매소성 전투, 해상의 기벌포 전투에서 승리하며 결국 당의 세력을 몰아내고 676년에 결국 삼국을 통일함으로 한반도의 단일국가의 기틀이 놓이게 되었다.

특히 기벌포 전승 2년 후인 678년에 문무대왕은 그때까지 병부(국방부)에 속해 있던 해군·해운 부문을 독립시켜 병부와 동격인 선부를 창설했는데, 이것은 해상세력의 우위가 나라의 안보와 발전에 매우 중요한 부문임을 인식한 문무대왕의 선구적인 생각이었다.

국가의 앞날을 위해 했던 문무대왕의 이러한 대비가 훗날 흥덕왕 때 동아시아의 바다를 제패한 해상왕 장보고의 탄생이 가능하게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된다.

필자는 이번 행사를 진행하면서 장보고에 관한 다양한 서적들과 자료들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에 반해 문무대왕에 관한 서적이나 학술적 자료들이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위해 일신의 기력을 소진한 탓일까, 문무대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에 681년 56세의 나이로, 삼국통일을 이룬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대왕은 평소에 지의법사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문무대왕 : “짐은 죽은 후에 나라를 지키는 용(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

지의법사 : “용이란 축생보(畜生報 ; 중생들이 축생의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되는 과보)가 되는데 어찌합니까?”

문무대왕 :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랜 지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면 짐의 뜻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문무대왕의 유언에 따라 '삼국사기'에는 동해 어귀 큰 바위에 문무대왕을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문무대왕을 장사를 지냈다고 전해지는 장소가 바로 지금의 경북 경주시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문무대왕릉)이다.

오늘날에 경주에 가보면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는 집체보다 큰 무덤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의 업적을 놓고 본다면 단연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 할 수 있지만, 문무대왕은 그러한 허례허식이 아니라 죽어서까지 나라를 지키겠다는 그의 애국, 애민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신라의 삼국통일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번 기회를 통해 문무대왕에 관해 새로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문무대왕이 가진 그러한 정신만큼은 보존 되고 계승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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