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茶 그리고 향기] 사는 일 / 허 연(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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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茶 그리고 향기] 사는 일 / 허 연(1966~)
  • 김명기
  • 승인 2020.06.14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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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해 집을 뛰쳐나간 아버지와

전화통 붙들고 싸운 날

회사에선 시말서를 쓴다.

공교로운 것이 아니라 그게 사는 거다.

때 맞춰 창밖 남산에 눈이 내리거나

옛 애인이 오랜만에 예수 믿으라는 전화를 걸어온다면

판단 안 서는 그 상황은 차라리 아름답다.

가장 축약된 문장으로 비겁한 시말서를 쓰고

삼거리 부대찌개를 먹고

담배를 반쯤 피우다 말고

다시 아버지에게 전화를 한다.

누워 있는 불상들이 일어서는 것만큼

삶이 호쾌해지는 건 힘든 일이다.
 


[쉼표] 매년 가난한 직업을 순위 매기는 조사를 한다.

그런 쓸데없는 조사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으나, 시인을 직업이라고 생각하기는 할까.

조사에서 1,2위를 다투는 직업이 성직자와 시인이다.

성직자와 시인을 직업이라고 말한다면 애초부터 정해지 순위다.

돈과 큰 인연이 없는 직업인줄 알고 시작했으니까.

그러나 시인은 성직자와 또 다른 삶이다. 대체로 자기 정신의 기반은 시에 두고 있지만

속세에서 살아가기 위해 몸을 부려야 한다.

수많은 사람 틈에 끼여 삶을 받아내느라 정신없기는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인의 수입 대부분은 원고료가 아니라 여느 사람과 똑같이 몸을 부린 대가로 산다.

그러니 삶이 호쾌해지기란 힘든 일이다. 허연 시인의 시 ‘사는 일’은 호쾌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호쾌하게 보여준다.

보라! 시인도 마음 상하고 비겁한 시말서를 쓰며 상처받고 화해한다.

사는 일이 다 그렇다.

다만 시인은 그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문장을 만들어내는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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